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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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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기행 - 울릉군 서면 태하리 도동항에서 조금 올라가면 버스 승강장이 있다. 육지에서의 그런 승강장을 생각했다가는 오산. 그렇다고 아주 오래된 구조물도 아니다. 태하를 처음 들어가는 것이라 낯설고 또 그 위치를 잘 몰라 설레임도 같이 있었다. 울릉군청에서 친철하게 버스 시간표를 출력해 줘서, 그걸 믿고 버스에 승차. 40분의 간격으로...태하까지 운임료는 1,500원.... 항상 자가용으로 운전을 하다가 이렇게 버스편으로 한가롭게 바깥 경치를 구경하며 가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1박2일의 짧은 여정으로 왔기에...서두른다. 40분 지나니 태하마을이 나타났다. 찾기도 참 쉽다. 다른 마을 같은 경우에는 가는 길에 정류장이 있어 버스가 서는데 태하마을의 경우에는 마을로 들어왔다가 다시 들어왔던 길로 나가기 때문에 찾기는 쉬운것 같다...
울릉도 기행 (울릉군 서면 태하리) - 태하 방파제에서 바라본 "만물상" 만 가지의 상이 보이는 절경이라 하여 만물상이다. 태하 내륙에서 뻗어 내려오던 산줄기가 곧장 바다로 곤두박질친 자리에 바로 만물상의 비경이 장쾌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만물상의 비경을 보기 위한 가장 좋은 자리는 등성이를 타고 바다 쪽으로 약간 내려간 바위 위다. 코앞의 작은 등성이에 펼쳐진 오밀조밀한 풍경은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울릉도 기행 (울릉군 서면 태하리) - 소라계단과 황토굴 태하마을에서 모노레일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것이 나선형 계단 구조인 소라계단이 나타난다.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며 예전의 아슬아슬한 길도 눈에 띈다. 그리고 소라계단이 있는 한쪽 굴을 보면 붉은 빛의 황토가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태하의 황토굴이란다. 태하는 원래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하여 하여 황토구미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황토가 나라에 상납까지 되었다고 하며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보냈는데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 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태하는 김(해초)이 많아서 태하라고 하기도 하고, 안개가 많아서 태하라고도 한다. 또한 울릉8경의 하나인 태하낙조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이다. 전설(황토구미) 삼척의 어느 사또가 ..
울릉도 기행 (울릉군 서면 태하리) - 성하신당 울릉도 사람들이 배를 새로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 반드시 와서 빈다는 곳이다. 마을 안쪽 솔숲에 있는 이 신당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설 조선 태종 때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 곳 태하동에 도착했다. 관내 전역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출항을 위해 잠을 자던 중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출항을 명령했다. 그러자 갑자기 풍파가 일더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문득 전날 꿈이 떠올라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두고 무사히 육지로 돌아갔다. 몇 년 뒤 다시 울릉도 안무사의 명을 받고 태하리에 도착하여 수색을 했는데, 그 때 유숙하였던 곳..
울릉도 기행 (울릉군 서면 태하리) - 울릉도 태하리 광서명 각석문 버스승강장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자연 암반면에 새겨진 각문이 있다. 학포마을 바닷가의 임오명 각석문과 마찬가지로 개척무렵의 각석문이다. 이 각석문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음각한 것으로 1890년 4월 울릉도 개척 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으며 그 해에 쥐가 끓어 흉년이 들자 울릉도 사정을 안 영의정이 구휼미를 보내서 흉년을 넘기게 되었으며 울릉도 개척민들이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당시 도장인 서경수와 오위장을 지낸 손주영이 새긴 것이다. (도지정문화재 제411호)
울릉도 기행 (울릉군 서면 태하리) - 모노레일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가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있다. 모노레일..처음에 그 모습을 보지 못한채 생각하기에는 아주 작은 몇명이 타는 그런 모노레일로 생각하고있었는데 정작 그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는...정말 크다 라고 속으로 생각할 정도.